친한 지인 중에 한국 드라마 마니아인 스위스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드라마에 중독되어있다고 밝히길래 그런가 했는데, 어느 날 이분이 드라마를 전혀 보지 않는 제게 ‘일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 광고영상을 보냈길래 “뭐지, 이건?” 싶었죠.
스위스 시골에서 자란 그 사람은 제게 자기가 지금 이 드라마를 너무 재밌게 보는 중인데 현실을 꼬집는 드라마의 설정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도대체가 믿어지질 않는다며, 제게 실제 대한민국의 입시경쟁이 그렇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지를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과열된 입시경쟁을 창의적이고 희극적으로 꼬집은 드라마인가?” 생각하며 대면한 짧은 영상에서 무슨 대단한 재미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더 호기심이 가기도 했죠.
드라마가 정말 재미있기는 한데,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입시경쟁이 치여서 정말 죽음으로 몰리기까지 하는 상황인지, 자기는 아무래도 이해가 아니 간다며, 이제는 드라마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다고 토로하는 그분에게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야 한국을 떠나기까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모두 강남 8학군에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입시경쟁의 병폐를 아주 모를 수는 없는 처지여서 담담하게 “내 생각에는 나름대로 근거는 있는 설정일 것이다.”라고 무미건조한 답신을 보낼 뿐이었죠.
지금이야 연예인이 딴따라 취급받기는커녕 최고 유망직종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급변했기로, 오직 공부와 대학에만 목숨 걸던 풍토는 사라졌지만도 제가 어렸을 때(90년대)만 해도 입시경쟁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선택한 고등학생의 소문이 심심찮게 돌곤 하였습니다.
저의 짧았던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일들도 스쳐 지나갔죠. 당시 전교 회장이 된 2학년 선배가 1학년 교실들을 배회하다 저를 보고서는 그냥 저에게 체육부장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거 할 줄 모른다고 했더니. 별로 하는 것 없다고, 자기도 1학년 때 체육부장이었는데 체육대회 때 축구공 나눠주는 것이 다더라고 하면서 그냥 하라고 하기에 “네. 그럼 하겠습니다.” 했는데, 정말 별거 아닌 줄 알았더니만 얼마 후에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교무실로 따로 불러내셨죠.
제게 저의 중학교 성적표를 보여주시면서 이런 성적표를 가지고 체육부장을 하려고 했냐고 하시면서 그 자리는 성적이 좋은 다른 학생에게 넘어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학생회장 선배가 하라고 해서 하겠다고 했는데 꾸중을 들었죠. 아마도 체육부장을 하면 가산점이라는 것이 붙는 모양이었고, 저같이 대학도 못 갈 학생한테는 아무런 필요도 없는 가산점인데 왜 욕심을 내냐는 맥락이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제가 부반장이 되었죠. 제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누가 손을 들고 추천하기에 그냥 나갔던 건데, 덜컥 부반장이 되었습니다. 그게 다였죠. 하지만 담임 선생님께서는 대학도 못 갈 녀석이 왜 다른 사람이 탈 수 있는 가산점을 자꾸 가로채 가는지 의아해하시는 듯했습니다. 좋은 분이셨지만 제게는 별로 정이 아니 가시는 모양이셨죠.
당시에 제가 가장 좋아하던 선생님 두 분 중 한 분이셨던 수학 선생님은 수업 중에 가끔 저희 담임 선생님을 칭찬하곤 하셨습니다. 예전에 어떤 학생이 지각할까 봐서 오토바이인지 자전거인지를 타고 등교를 서두르던 중 학교 앞에서 우유배달 트럭과 부딪혀 사망한 사건이 있었던 후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자원하여 아침마다 등굣길 교통정리를 하시는 분이 저희 담임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제게는 친절하신 분은 아니셨지만 실제로 저의 담임 선생님은 제가 보기에도 꽤 좋은 분이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눈에는 성적이 형편없는 제가 분수를 모르고 너무 나대어 주변 학생에게 돌아갈 수 있는 혜택을 가로채는 녀석으로 비쳤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중간고사가 찾아왔죠. 모든 과목에 다 약했지만, 특히나 암기에 더 약했던 저의 손등에는 중간고사 기간 내내 큼지막하게 단어가 적혀있곤 하였습니다. 다음날 시험치를 과목과 관련된 단어였죠.
그렇게 시험을 봐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 직전에 시험지를 가지고 들어오신 선생님은 제가 전혀 모르는 분이셨는데 커닝에 대해 단단히 경고하시면서 손에 적힌 것들을 당장 다 지우라고 하셨죠.
그렇게 시험지를 나누어 주기에 앞서 선생님께서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의 손을 검사하시는 중에 저도 손등에 적혀있던 것을 제 침으로 대충 닦아내었죠. 그런데 그 선생님이 제 손등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목소리가 크고 위협적이었지만 저는 차분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생님, 그런 것이 아니고요. 이건 내일 볼 기술 과목과 관련된 단어를 적어 놓았던 거여요. 읽어보세요. 지금 보는 과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어에요.”
그런데도 계속 어디서 커닝하려고 했냐면서, 자기가 우습냐고 뭐라고 자꾸 역정을 내셔서, 저는 다시 한번 자세히 보시면 지금 보는 과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내일 보는 기술 과목과 관련된 단어라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또 어디서 눈을 부라리냐며 뭐라 뭐라 하시는 것이셔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사이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그분은 시험지 앞에 꼿꼿이 서셔서 부동의 자세로 제가 잘못을 뉘우치고 죄송하다고 사죄하기 전에는 시험지를 배부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죠. 그렇게 다른 학생들까지 시험을 보지 못하고 정적이 감돌아 바로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렇게 시험지가 배부되어 그 사건 또한 마무리된 줄 알았었죠.
그런데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분은 학생부장님의 교무실로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학생부장님께 뭐라 뭐라 저를 참소하시기에 저도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제 손등을 보여드렸더니 학생부장 선생님께서는 처를 측은히 여기시는 눈빛을 보이시며 그냥 자기 자리로 가셔서 앉아 다른 일을 보시는 것이었죠.
제게 화가 난 선생님은 아무도 저를 훈계하지 않자 분이 풀리지 않으셨는지 무릎을 꿇고 있는 제게 다가오셔서 다짜고짜 제 이마를 가격하기 시작하셨죠. 이십 번이고 삼십 번이고 연속적으로 이마를 가격하시니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며 그제야 “아, 잘못 걸렸구나.” 싶은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그냥 다혈질 선생님의 신경질적인 체벌로만 치부하기에는 뭔가 마음 깊은 곳에서 광기가 서린 분노가 느껴졌기에 정신이 얼얼한 것은 둘째치고 놀란 마음으로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죠.
그때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그 선생님은 제 담임 선생님께 저를 참소하시기 시작하셨지만, 담임 선생님은 대꾸를 안 하시고 그저 저를 보시며 “나와”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담임 선생님께 들을 잔소리를 기대하면서 교무실에 이르렀는데 웬걸 담임 선생님께서는 별말씀도 없이 그저 본인의 짐을 뒤지시면서 홍삼 병인지 뭔지 하나를 발견하여 제게 쥐여주시면서 “고생했다. 가봐라.”하시는 것이어서 사뭇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분으로부터 따뜻함을 느꼈던 것은 그때가 유일했죠. 그렇게 중간고사가 마무리되고 성적이 나왔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생들 이름 한명 한명씩 호명하여 불러내시며 성적표를 나누어 주셨는데, 특별히 중학교 때보다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들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학우들의 박수갈채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때는 보지 못했던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대략 평균 점수가 8~10점 정도씩 껑충 오른 약 3, 4명 정도가 따뜻한 칭찬과 박수갈채를 받은 후 제 차례가 왔죠. 저는 중학교 때 평균이 60점대였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성적에 신경을 써보자 해서 80점대가 나왔으니 약 20점이 올랐던 상황이었습니다.
딱히 중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앞반(1반~5반)과 중간(6반~10반), 그리고 뒷반(11반~끝 반)에서 필기를 잘하는 애들에게 공책을 빌려 한 과목당 필기한 내용이 세 개에 이르렀고, 그 세 개의 필기 중 겹치는 내용만 외우는 방법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특히 약하던 암기과목에서 성적이 부쩍 향상했죠.
그래서 엄청난 칭찬을 들을 줄 알았지만, 선생님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경멸하듯 보시며 시험지를 주시고는 바로 다음번 학생을 호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커닝하였다고 판단하시는 듯하셨지만, 저는 “평균 80점대이던 학생이 90점대가 되면 칭찬을 받고 60점대이던 학생이 80점대가 되면 의심받는 것이 당연한 세상인가 보다.”하며 억울함을 호소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저는 코스타리카로 이민을 하였고 1년여의 세월이 흘렀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 1학년 때 저와 같은 반이던 학생, 학교생활에 문제없이 적응하던 친구였지만 노력하는 것에 비해 시험성적이 잘 나오지 않던 그 친구가 학교 화장실에서 떨어져 사망하였다는 소식이었죠.
시험 중 커닝하다가 하필 그때 저를 체벌했던 바로 그 선생님께 걸려서 뺨을 몇 대 맞았다는 것 같습니다. 맞아본 사람만 아는, 그 광기 어린 분노의 체벌로 머리가 멍해졌었을 것이고, 그대로 그렇게 자살을 선택하였던 것이었죠. 지금도 청소 시간에 보았던 그 친구의 웃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열된 경쟁사회와 경직되고 뒤틀린 교육제도의 불합리한 틀 안에 짓이기고 짓밟혀 힘들어하는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와 선생님들의 넓은 따스함일 것입니다.
하여간 저의 속은 모르고, 그 스위스인은 다짜고짜 “아니다. 내 생각에는 분명 많이 과장된 설정일 것이다. 네가 드라마를 직접 보고 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죠. 저는 “그딴 드라마가 뭐가 중요나 하다고.”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워낙에 각별한 사이라 부탁을 저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성가시지만 그래도 그 사람의 부탁이니 4화 정도까지만 봐보자”하며 뭔가 숙제하는 기분으로 드라마를 보게 되었죠. 8년 반 전, 갑자기 몸이 아프게 되면서부터는 영화 한 편을 보기도 벅찬 상태가 되었기로 영화는 가끔 보았지만도 장시간을 요구하는 드라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9년 만에 마주하게 된 드라마였지만 처음에는 예전에 보던 드라마랑 별로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진부함과 유치함이라도 자연스러우면 좋은데 별로 자연스러워 보이지도 않았고, 대한민국 최고의 학원강사(수학)라는 남자주인공이 스트레스성 위장병에 시달려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를 못하면서도 시원한 물은 벌컥벌컥 잘만 마셔대는 것이야 뭐, 귀엽게 봐줘도 그 외의 뜬금없는 연출들에서는 혼자 고상하게 오글거림을 느끼곤 했죠.
그렇게 일타 스캔들 1화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죠. 계속해서 위장병으로 고생하느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주인공에게 그의 비서(정 실장)가 여자주인공의 반찬가게에서 구매한 도시락을 건네주게 되면서 “에이 설마.”하는 상황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하였습니다.
“에이, 진짜. 아니겠지. 아닐거야. 설마.”하면서 보았지만 역시나, 그런 거였죠. 황당무계한 연출의 연장선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된 지 오래여서 영양실조까지 걸린 사람이 여자주인공이 요리한 도시락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 먹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살아야지.”하는 말을 시작으로 나무젓가락을 잡고 도시락을 열어 한 모금 씹자마자 반찬에서 “다름”을 느낀 남자주인공은 이내 울먹이며 음식을 우걱우걱 먹어대기 시작했고 저는 그런 억지스러운 장면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진짜, 뭐냐. 이건.” 싶었죠. 제 눈에서 눈물이 뚜루륵 뚜루룩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왜 울어?”하면서 황당한 눈물을 멈추려 하였지만, 배속 깊은 곳에서 끓여저 나오는 눈물이었기로 멈출 엄두가 나질 않았죠. “이 드라마, 감동되지도 않는데 왜 눈물은 나지?”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로 다음 화를 시청했고, 시간이 지나 진정이 된 후 다시금 그 1화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했더니 별 이유 없이 또 감동이 되어 눈물이 샘솟는 것이었습니다.
“아, 뭐지, 이 드라마.” 대체 이해되지 않는 감동과 눈물을 마주하면서는 저를 돌아보지 않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기억이 났습니다.
약 8년 전, 유럽 여행 후 코스타리카에 도착한 후부터 갑자기 많이 아프게 되면서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었습니다. 먹을 때도 힘들었지만 먹고 나면 몸이 더 아팠죠. 원래 몸무게가 늘 77kg 정도 되었었는데 순식간에 64kg 정도가 되더니 계속 내려만 가는 것이었죠.
그렇게 59kg이 되고 58kg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몸무게를 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체중계 자체를 멀리하고 살았습니다. 체중계 위에 올라가는게 무서웠죠. 그런데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삐쩍 말라서는 추위에 오들오들 떠느라 다들 여름옷인데 혼자 오리털 조끼를 입고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예배 인도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혼자 교회 주차장에 서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언뜻 왼편을 보니 그 예배 인도자가 혼자서 제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뭔가 분위기가 굉장히 푸근하고 편안해서 “뭐지. 저 분, 뭐야.” 하면서 억지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제 앞에 서시더니 자기소개 후 다음 주에 교회 끝나고 자기네 집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죠.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은 심정과 상황이었지만 하도 그분의 분위기가 차분하고 평온하여 그냥 알겠다고 대답을 해버렸습니다. 그렇게 7일 후, 그분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죠. 코스타리카에 온 캐나다 선교사 부부가 낳은 세 자녀가 모두 코스타리카에 자리를 잡아 자녀들을 낳고 손자, 손녀들을 보면서 일요일마다 모여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저를 초대해주신 예배 인도자는 그 캐나다 선교사님(올리바 할머니)의 첫째 며느리셨죠. “뭐지 이 대가족 분위기는.” 하면서 앉아있던 제게 음식이 서빙되었습니다. 당연히 접시 한가득하였죠. 저는 “아, 나 이거 다 못 먹는데.”하고 걱정하면서 접시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접시를 다 비웠죠. 정말 놀라웠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눈물이 고이거나 감동이 되거나 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오, 다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하고 안도했던 게 전부였죠. 먹고 나서도 의례 그러하듯 숨이 잘 안쉬어지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상했죠.
그 이후 주일 점심마다 그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가 대부분이었고 그렇게나 먹지 못하고 고생하던 제가 그 가족을 통해 음식을 먹으며 기력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죠. 그렇게 일년이 지났고, 기력이 회복된 저는 한국으로 떠나기로 한 저의 결심을 그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 인도자님의 남편으로서 부부가 함께 금요일마다 제게 상담과 기도를 해주시던 에드 장로님께서 반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한국으로 갈 때가 아닌것 같다는 것이셨는데 저는 한국행을 고집했고, 코스타리카를 떠나기 마지막 금요일날 저를 송별해주기 위해 본인 집으로 기도팀들을 호출하셨죠.
그렇게 모인 사람 중 한 여성분이 제가 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한국행에는 많은 장애와 방해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셨고 에드 장로님께서도 동의를 하시는지 묵직한 침묵으로 제 표정을 살피셨지만 저의 결심(고집)은 흔들리지 않았죠. 그렇게 한국에 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고생길이 시작되어 다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에드 장로님은 계속해서 저와 주기적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싶어하셨지만 저는 상황이 너무나 안좋다고 판단하여, 안좋은 모습을 보여드기가 죄송스러워 연락을 거절했고, 그분도 그런 제 마음(쓸데없는 자존심)을 알아 채셨는지 제게 연락하기를 그치셨고, 그렇게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레 두절되게 되었죠.
그분들이 제게 사랑한다고 말한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식탁에서 분명히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저를 떠나 보내실때 냉철하기 짝이 없으신 에드 장로님의 눈에 고였던 촉촉하게 반짝이는 그 눈물은 제게 사랑을 증거하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이유인지 그 분들을 통해, 고생 고생 하면서도 그 집을 드나들며 식사를 제대로 하게 되었던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는 것을 '일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죠.
너무 어이가 없으니 깜짝 놀랄것도 없더군요. "아니. 왜 이 기억을 못하고 살았지?" 싶으면서도 막상 더 놀라왔던 것은 의식적으로는 이미 기억을 못하고 있으면서도 드라마를 볼 때에 무의식이 반응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었죠. 사랑과 같은 진정하고 영원한 것은 기억에서 잊혀질 수는 잇어도 여전히 마음 깊숙히 남아 영향을 행사함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기억이 살아나니 제가 한때나마 잠시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도 다시 제 안에서 부활하듯 생동감있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Always eat it to remember me.)
재미있는 드라마 한 편(16부작) 덕에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성찬식이 기대되는 6월입니다.